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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전의유래비 제막식
‘전의면 출범 100주년 기념 건립’
2015년 07월 12일 (일) 12:34:49 김문창 기자 moonlh@hanmail.net
   

세종특별자치시(시장 이춘희) 전의유래비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병하)가 10일 전의면사무소 비석정원에서 전의유래비 제막식을 가졌다.

유래비 건립은 전의면 출범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전의의 유구한 역사를 재조명하고, 지명유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마련됐다.

제막식에는 이춘희 시장과 박경순 면장, 이병하 유래비 건립추진위원장을 비롯해 출향인사, 지역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3점의 조형물로 이뤄진 유래비는 2014년 11월에 구성된 건립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지역주민과 사회단체 등이 모금을 통해 비용을 마련했다.

유래비는 신동국여지승람에 나온 전의면의 모습인‘삼산이수(三山二水)’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지명 변천 과정과 백제시대에 전씨가 많이 살아서 ‘전의’라는 지명을 얻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운주산 치마바위를 만들어 놓은 남매장사의 전설

전의지역을 소개한  글 

신정일 저 (문화사학자, 책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 황금나침판/출판)

(편집자는 전의지역의 역사와 지명을 잘소개한 글을 첨부했다. )

 김휴가 지은 시에 “세봉이 높이솟아 평야를 에웠고, 두물이 흘러서 옛 성을 둘렀네”하였던 전의는 충남연기군에 딸린 하나의 면이지만 전에는 조선시대의 현이었다.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금지(金池)로 고쳐서 대록군(大麓郡)의 속현으로 만들었던 것을 고려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1395년 (태조4년)에 감무를 두었고, 1413년(태종13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다. 다음해에 연기현을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으로 하였다가 1416년에 각각 환원되어 현이 되었고, 1914년에 연기군에 병합되었다.

 이 지역은 금북정맥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사방으로 산지에 둘러쌓인 분지로 대부천(大剖川)이 남쪽의 계곡을 통과하여 금강에 합류하였다. 백제시대에는 북방의 군사적 요지로 증산성(甑山城), 고산성(高山城), 운주성, 운주산남성 등의 산성을 쌓았고,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목천, 천안,연기와 연결되었다.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에 있는 전의 향교는 1416년에 창건되었는데 충청남도 기념물 제124호 지정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전의의 경계는 동쪽으로는 청주(淸州)경계까지 18리, 남쪽으로는 연기현(燕岐縣)경계까지 18리,시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는 목천현(木川縣)경계까지 1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43리이다.

 전의의 진산(鎭山)은 증산(甑山)으로 현의 서북쪽 5리에 있었고, 율현(栗縣)은 현의 동쪽1리에 있었으며, 운주산(운주산)은 현의 남쪽 7리에 있었는데 증산, 고산과 더불어 솥발모양으로 솟아있다. 운주산에 있는 운점사(雲岾寺)를 두고서 최유종(崔有悰, 태종14년-1414년 과거급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절이 연하 속에 있는데 층층한 봉우리 몇 겹이더냐. 산이 깊으니 낙락장송 빼어 있고 강 넓으매 물이 출렁거린다. 설법하는 강단은 높은데서 나려다 보고, 승방의 창은 반공중에 의지했네. 머리 돌려보니 진세가 아득하고 늙은 중이 스스로 조용하다.”

 이성(李城) 은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있는 석성으로 충청남도가 기념물 제77호인데, 세상에서 전해오기를 “옛날 이도(李悼 고려전기 개국공신, 전의이씨 시조 )가 살았던 곳이라 한다. 성안이 넓어 주위가 1,184척이고 안에 우물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고 하였다.

 이도에 관련해 한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려 태조가 남으로 정벌할 때 금강에 이르자 물이 범람하였다. 그러자 이도가 태조를 보호해 건너는데 공이 있어 도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이도의 벼슬은 태사 삼중대광에 이르렀다. 이태사유허비(李太師遺墟碑)는 이성산에 잇는 이도의 공적을 적은 비로 이도가 이곳에 살면서 집을 남북 두곳에 두고 여름에는 서늘한 북쪽집에, 겨울에는 온화한 남쪽 집에 거처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전동면(全東面) 금사리 사기소(沙器所)는 고려초부터 조선시대까지 사기소를 두고 사기를 만들었던 곳이고, 사기소에서 공주 의당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그 아래 주막이 있었다.

 다방리(多方里)는 본래 전의군 소서면 지역으로, 비암사(碑岩寺)는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에 잇는 절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마곡사의 말사인 비암사는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삼국시대 창건한 절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말에 도선국사(옥룡자)가 중창하였으며, 그 뒤의 뚜렷한 역사는 전해 지지 않고 있다. 이절의 극락전 앞뜰에 세워져 잇는 삼층석탑 정상부근에서 발견된 사면군상(四面群像) 때문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석상 중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은 국보 106호로,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은 보물제 367호로, 미륵보살반가석상은 보물 제3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면군상이 발견된 삼층석탑은 충남도 유형문화제 제 119호로 지정되어 있고, 비암사 극락보전은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2칸 구모인 이 건물은 다포식 건물로 정면 3칸의 기둥을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사분합의 띠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면은 화벽을 쳤다. 전내에 아미타불을 안치한 이 건물은 칡 대들보로 되었다는 닫집이 유명하다.

 동혈(銅穴)재는 다락골에서 공주의당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의당면에 동혈사가 있다. 사방골은 다방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동북쪽에 높은 산이 있고, 서쪽으로 트였다.

 달전리(達田里)는 본래 전의면소서면의 지역으로 높은지대에 위치하여 다락과 같으므로 다락골 또는 달전이라 하였으며, 부거곡(富居谷)은 쇠성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어떤 부자가 경치 좋은 산수를 찾아 이곳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삼천바위(삼천암)는 운주산 중턱에 있는 바위로 바위 밑에 크고 깊은 굴이 있고, 그곳에 목천의 수신면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한다. 임진왜란때 그 굴에 삼천명이 피난하였다가 어린애가 우는 바람에 왜적에게 발각되어 모두 피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치마바위는 삼천바위 아래 잇는 바위로 잔돌이 쌓여 큰 바위를 이루었다는 곳이다. 이 바위에는 이런 전설이 서려있다.

“옛날 남매장사가 서로 목숨을 걸고 언약하기를 , 남동생은 송아지를 끌고 서울갔다오고 누이는 운주산에 성을 쌓기로 하였는데 그 어머니가 보니 아들이 질것이 분명하므로, 아들이 이기게 하려고 아침국밥을 모두 딸에게 권하여 먹였다. 그동안 아들이 돌아오자 딸이 깜짝놀라 치마에 싼 돌을 산기슭에 쏟아 놓았고 훗날 그것이 바위가 되었다한다.”

 수구동(水九洞)은 미륵당이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때 이곳에 피난하였던 수백명이왜적에게 피살되어 피가 내를 이루었으므로 피숫골 또는 피수동이라 하였는데 그이름이 흉하여 나중에 수구동으로 고쳤다한다.

 도덕리의 장군바위는 보평 북쪽 냇가 산기슭에 있는 바위로 큰 바위가 넓은 바위위에 얹혀있고 그 밑에 큰 내가 흐르는데 명종때 학자 박곤이 토정 이지함을 맞아 바위위에서 이학을 담론 하였던 곳이라고 하며, 봉대리 고싯재는 전동면에서 천안 수신면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운주산과 만경대 중간에 허리가 잘록하게 되어 있는 곳이다.

 석곡리는 본래 전의군 동면지역으로 마을 앞에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배기 또는 들꽃이라 하였는데, 선돌은 옛날의 한 장수가 짚고 다니던 돌 지팡이라는 전설이 남아 있다.

 성재(토성)는 하소골 동북쪽, 송곡리 산 26번지에 있는 낮은 토성이다. 아래위 두층으로 되어 있는데 삼한 때의 농성이라 부르며, 송성리의 무드리(무도리, 수회리)는 잿말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냇물이 빙 돌아가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솔티고개는 중말 서남쪽이 있는 고개로 고개가 길고 험해서 도둑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양곡리(양곡리) 아래가느실은 가느실 아래 있는 마을로 봉수산 밑이며, 위 양지말(양장리)은 양지말 위쪽에 있는 마을로 지도를 만들 때 잘못 적어 양장리라고 하였으며, 주막뜸(주막촌)은 상세동 서쪽 길가에 있는 마을로 주막이다.

 영당리의 아래마느실고개는 아래 마느실에서 천안 공덕면 원덕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압실고개는 압실에서 천안광덕면 원덕리와 공주정안면 사현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이다. 개미기고개(의현)는 청산에서 전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길이 잘록하여 개미허리와 비슷하다.

 동막골(동막)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은 어려운 사람들이 움집을 짓고 살다가 점점 큰마을을 이루었고, 청송리의 도청(都靑)은 삼송정 동남쪽에 있는 큰 마을로 전의이씨와 거창신씨가 살면서 서로의좋게 모이는 도회청을 두었으므로 도청이라 하였는데, 일제때 쉬운글자를 취하여 도청이 되었다.

 배일은 운주산 남쪽 밑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높고 골이 아늑하므로 배울, 배일 또는 이곡이라 하였는데, 정조때 학자 권복(權馥 정조 19년에 진사 /참고- 權復은 세종17년에 무관에 급제한사람과 다름)이 살면서 호를 이일이라하고 , 마을 입구에 ‘이일동천(梨逸洞天)이란 비를 세워서 마을 이름을 고쳤다.

 소정면 고등리는 본래 전의군 북면의 지역으로 골짜기가 곧고 넓어, 곧은 골이라 하다가 변하여 고등이가 되었으며, 고등이 고개(고등이재 고등현)는 고등리에서 대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예전에는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어서 행인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세거리는 안골동북쪽에 잇는 마을로 동,서,북 세곳으로 가는 갈랫길이 있었으며, 아야목(我也目)세거리 북쪽에 잇는 마을로 고려성 아랫니며 고려 홍건적의 난 때 고려성에서 피난하면서 먹을 물이 떨어져 견딜 수 없자, “아야목아”하고 울면서 산 밑으로 내려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월조산(月照山)은 고려성 위쪽에 있는 산으로 전의읍의 주봉이다.

 관정리(觀亭里)의 군량(軍糧)골은 시루성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 대우향이 있을 때 사루성을 쌓고 군량을 두었던 곳이며, 1914년까지 이곳에 전의군 복면사무소가 있었는데 땅을 파다가 수백년된 진창미(陣倉米)가 나왔다. 대추리(취촌)는 사관정 앞에 있는 마을로 큰 가래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에 술이 많이 있어서 오는 사람마다 술에 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초정(椒井-우물)은 탑고개 있는 우물로 1444년(세종 26년)에 세종이 한글을 연구하다가 얻은 안질을 고치기 위하여 그해 3월2일부터 5월2일까지 청주초정에 머물렀다. 그후 초정보다 더 좋은 곳을 물색하다가 4월15일 병조의 제청에 의하며 목천, 초정 두 곳과 전의 초정 네 곳을 수축하고 6월1일 내섭시윤 김완의 답사보고에 의하여 가을에 이곳에 행궁을 짓고, 명년에 거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윤칠월 22일에 안질이 있는 이내은과 김을생을 이곳에 보내어 치료를 시험해보고, 그 이튿날 또 전경시서령 장택과 중 신정을 보내어 눈병을 치료 하게 하였다. 가을에 목천 대정리에다 행궁을 지으려다가 민페를 생각하여 그만두고 1445년(세종27년)2월에 초정물을 병에 넣어 서울로 올려다가 시험하였다.

 탑고개는 중태우에서 천안성남면 줄실로 넘어가는 고개로 중실쪽에 탑골이 있고, 태우(대부)는 관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상고시대 때에 태우향(大部鄕)이 있었던 곳이다.

 한글학회에서 나온<한국지명총람>전의면 편을 보면 단종 때 사육신의 한사람이었던 박팽년의 아버지 중림, 백부인 맹년,숙부인 계년 삼형제가 이곳에 살면서 대부벼슬을 하였던 곳으로 효종때의 문신인 이상(李翔) 또한 이곳에 살면서 호를 타우(打愚)라 하였다.

 노곡리의 어리미재(빙현)는 거리실에서 천안 성남면 밤실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고 골이 깊어서 도적이 많으므로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넘어 다녔다. 형제봉은 거리실 뒤에 있는 산으로 산봉우리 둘이 쌍으로 있는데 위봉우리는 좀 높고 아래봉우리는 좀 낮다.

 대곡리의 공말(궁리)은 역말 서쪽에 있는 마을로 앞들에 궁 땅이 많이 있었다. 본래 천안군 소동면의 지역인데 191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전의면에 편입되었다. 역말(역리, 김제역말, 진게역말)은 맹골북쪽 큰 길가에 잇는 마을로 본래 천안군 소동면의 지역이었다.

 한적골(한절골, 대사동)은 대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고등이재 밑에 있는데, 예전에는 큰절이 있었고 지금도 3층석탑이 남아있으며, 동교리의 소리재 고개는 관정골에서 군량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전의면 읍내리의 주룡이 되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장군 이여송이 산맥을 끊을 때 소리가 났다한다. 여수바위(여우바위, 호암)는 평전말 남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여우와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904년 경부선 철도를 놓을 때 이 바위를 파내려하자, 주관자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호령을 하여 중지되었다한다.

 신정리의 돌뜨기산은 가나몰 동족에 있는 산에 돌이 많았고 옛날부터 이 이름처럼 장차 돌을 파내게 돌것이라 하더니, 과연 1901년 경부선철도를 놓을 때 일인들이 파내 가져갔다.

 부청당터는 그줄 입구에 있는 터로 전에 절이 있다가 헐리고 부처만 다섯이 있었는데 1901년 일인들이 가져갔다. 오릿골(오류동)은 양안 서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전의면에서 5리 거리이다.

 유천리에 있는 이태사 산소는 양안 뒤에 있는 전의 이씨의 시조 이도의묘소로 복호형(伏虎形)하는데 앞에는 개바위, 창날 등이 있다.

 읍내리의 전의초등학교자리는 전의현의 객사가 있던 곳으로 1464년(세조10)2월30일에 세조가 보은 속리산을 구경하고 온양온천에 가는 길에 하룻밤을 묵었으며, 인조도 1624년(인조2년)2월18일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주에 있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묵었다.

 북바위(전송암)는 북부냇가 북숲에 잇는 평평하고 큰 바위로 그 옆에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었는데, 전의원을 이곳에서 전송하였으므로 전송암이라고도 하였다.

 전의초등학교 교정에는 현감 이열, 심치기, 변상대, 정중태, 강홍익의 영세불망비가 있다. 여수바위는 두집매위 냇가에 있던 바위로 1901년 없앴다.

 이곳 전의를 본관으로 둔사람 중에 조선 초기 문신인 이계맹(李繼孟)이 있다. 자는 희순이고 호는 묵곡인 그는 1483년에 진사,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489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죄목으로 영광에 유배되었다가 사제관계가 아님이 밝혀져 풀려났다. 오랫동안 야인으로 지내던 그는 1503년 장령이 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승진하였으나, 이듬해 박경의 옥사로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풀려났다. 평안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호조, 형조, 예조판서를 역임한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옳고 그른 것에 명백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군자다운 풍모가 있었다. 전주의 서산시우와 김제의 용암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文平이다.

 전의를 두고 김수령(金壽寧 1453년 단종1년 과거급제)은 “고을이 오래됨을 교목이 말해주고, 연기 차가우니 폐성 임을 알겠도다”하였고,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시에서 “땅은 차현을 나누어 스스로 동과서가 되었는데 길은 전성으로 들어서며 높았다가 낮았다가 하네. 산줄기 빙빙돌아 성곽을 에워쌌고, 숲 그늘 얽히고 둘리어 긴언덕을 보호하네”라고 묘사했다.

 전의는 현재 인근의 공주와 연기가 행정복합도시로 새로운 개발 열풍에 젖어 있는 것과 달리 예기억을 간직한채 잠잠히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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