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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50년전 3월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고등학교는?
“3.8민주화 시위운동이 4.19 혁명의 가교역할 담당”
2010년 04월 14일 (수) 16:34:32 김문창 기자 moonlh@hanmail.net
   
60년3월8일 이승만독재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대전고 학생을 경찰이 곤봉을 휘두르며 진압하고 있다....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 제공


50년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와 독재에 항거해 1960년 3월 8일과 10일 각각 대전고와 대전상고가 민주화시위를 이끌어 4.19혁명의 중간 가교 역할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14일 충남대학교 정심화홀에서 열린 ‘대전충청지역 4월 혁명과 한국민주주의 지역적 현안과 과제’를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허중 충남대교수와 송규진 고려대교수가 이같이 밝혔다.

허종충남대교수는 ‘대전지역 4월혁명기 학생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 발제에서 2·28 대구 학생시위 이후 울분은 깊어가는 상황에서 8일 민주당 정견발표가 있는 날을 기점으로 당시 대전고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은밀히 시위를 준비했다.

3월8일 대전고학생 1천여명이 독재타도 시위

그러나 낌새를 알아챈 교장은 7일 오전 교장 관사로 학생 간부들을 불러 “내일 민주당 정견 발표회에 한 명도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는 도리어 불만을 고조시켰다.

교장의 지시가 있던 그날 오후 8시 대전 동구 중동 한 학우의 집에서 박제구(학도호국단장), 정일근, 장연수, 김국태, 전성, 박명근, 박선영, 최정일 등 호국단 간부 10여 명이 모여 8일 오후 2시 야당 지도자인 장면 박사의 유세가 열리는 대전공설운동장을 거쳐 충남도청까지 행진을 벌이자고 결의했다.

또 학생들은 대전 시내 전 고등학교 학생들과 연합하여 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를 보고, 대전공고․ 대전상고․ 보문고․ 대전여고․ 서여고․ 호수돈여고의 학생 대표들에게 계획을 알리기로 결정하였다. 시위에 참여하는 학교의 대표는 8일 오전 11시에 YMCA에서 모임을 가지고 역할 분담을 하기로 결정하고 해산하였다

학생들의 시위계획은 이미 탄로나 8일 오전 9시경 교장은 학생 간부들을 교장관사로 불러 감금하고 시위 철회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 소식이 학교전체에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술렁였다. 오후 2시경 교장관사를 빠져나온 학생시위 지도부는 최정일 기율부장이 “나가자”고 외치자 1000여 명의 학생들은 교실을 박차고 나섰다. 의식 있는 교사들은 학생들을 막는 척하면서 오히려 독려했다.

대전고학생들은 계획된 행진로는 대전고∼대흥 사거리∼공설운동장∼인동시장∼충남도청이었고 경찰은 대흥 사거리와 공설운동장, 대전역 인근인 목척교 등 3곳에 저지선을 쳤다. 경찰은 공설운동장에서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 시위대를 분산시킨 뒤 기마대가 말을 타고 쫓아가 곤봉과 소총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연행했다. 학생들은 대흥동, 인동, 문창동 일대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다 아무 집에나 뛰어 들어갔지만 주민들은 말없이 숨겨줬다. 당시 시위로 80여 명이 연행됐고 주모자로 분류된 5명은 다음 날 새벽에야 풀려났다.

3월10일 대전 상고 7백여명 민주화 학생 시위

3·8시위는 본래 대전고와 대전상고, 대전공고, 대전여고, 보문고 등 대전지역의 여러 고교가 같이 벌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리 준비를 해온 대전고와 달리 다른 고교들은 불과 이틀 전에야 연락을 받아 시간이 촉박해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나마 시위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감시가 심했다.

8일 시위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던 중 대전상고가 단독으로 시위를 계획했다. 대전상고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자유당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선거유세가 열리는 10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하지만 이 시위계획도 탄로가 나버렸다. 연이은 시위에 비상이 걸린 경찰은 9일 전격적으로 채재선 학도호국단장 등 학생간부 7, 8명을 연행했다.

하지만 경찰의 이 같은 행동은 학생들을 더욱 자극했다. 2학년 이원옥 변병학 전희남 등 연행을 모면한 간부들은 전교생이 조례시간에 모두 모이는 점을 이용해 시위 계획을 앞당겨 시위를 주도했다.

1960년 3월 10일 오전 9시경 대전 동구 자양동 대전상고. 이원옥 씨 등은 전교생 700여 명을 운동장에 집합시킨 뒤 시위의 취지와 구호, 스크럼 짜는 법 등을 간단히 설명해주고 곧바로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워낙 기습적으로 감행해 교문을 벗어날 때까지 학교에서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동구 신안동 굴다리 부근인 파출소 앞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이 저지선은 그나마 수월하게 뚫었으나 다시 인근 대전우체국 앞의 2차 저지선은 견고해 시위대가 두 개로 분산됐다. 대전역과 목척교를 거치거나 중앙시장과 대흥동 사거리를 거쳐 대전경찰서(지금의 중부경찰서) 앞까지 행진했다. 이날 경찰과의 충돌로 수십 명이 다치고 연행된 뒤 낮 12시경에야 시위가 일단락됐다. 학교 측과 경찰은 “대전상고 시위는 연행학생 석방을 위한 시위”라며 시위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축소했다.

대전학생 3월 시위는 3·15 및 4·19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

송규진 고려대 교수는 “3·8시위와 이틀 뒤의 3·10시위는 2·28시위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역할을 하면서 곧바로 여야 정치권의 공방으로 비화됐다”며 “자유당은 ‘신성한 학원을 도구로 삼지 말라’며 민주당의 배후 조종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맞서 민주당은 ‘빈주먹으로 합법적 시위를 전개하는 학생들을 총과 곤봉으로 난타해 유혈사태를 빚은 경찰과 여당은 책임지라’고 반박하며 맞섰다”고 밝혔다.

이어 송교수는 “3·8과 3.10 대전 학생시위의 파급효과는 서울 등 전국 고교생들의 반독재 항거 데모로 이어졌다. 이는 불의와 부정, 부당에 맞서 저항한 시민의식의 발로였다”고 말하고 “대전의 학생시위가 3월15일과 4월19일 가교역할을 담당한 잊혀진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바로잡아야한다”고 말했다.

한편 3·8 민주의거 기념사업회와 대전충남 4·19혁명동지회가 2005년 8월 ‘3·8민주의거’는 당시 시위에 대한 여러 신문의 보도 상황을 상세히 분석한 자료집을 내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대전고 출신인 최우영, 김선균, 성주호, 김영광씨와 대전상고 출신인 이원옥, 전희남, 변병학씨 등이 매년 3·8민주의거기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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